엿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생각보다 안 춥군' 이라고 생각하며 출근하고 있었다. 

나는 새벽 5시 45분쯤 집을 나와 서울로 출근을 하는데 약 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직장까지.

아무튼.

난 오늘도 5시 45분에 집을 나섰고, 집에서 약 3분 정도 되는 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서 역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날이 밝거나, 사람들이 많을 땐 괜찮은 길인데 문제는 내가 출근하는 시간 때의 그 거리는 무척이나 어둡고 (가로등이 없다) 사람들이 잘 없다. 있어도 역 근처에나 많음. 다들 마을 버스를 타고 다녀서 그런지. 

그 어두운 거리를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고, 횡단보도를 건넌지 1분 정도 지났을 때 맞은 편에서 누군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냥 지나쳐 가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말을 하더군. 바로 이렇게.


"야.. 너 보지물 많게 생겼다. 야.. 너 되게 맛있겠다. 야, 내가 니 보지 빨아줄게. 어? 니 똥구멍에 쑤셔박고 싶다. 야 니 보지 빨아줄게 너도 내 자지 빨고. 어? 나랑 함 하자. 어? 너 존나 맛있겠다. 니 보지 빨아준다니까?"



....

.....

........




진짜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예전에 포스팅에 썼듯이, 어릴 적에 가슴을 치고 가는 남성이 있었고, 내 성기를 만지작 했던 동네 오빠(라고 부르기도 싫지만)가 있긴 했지만 그 당시엔 무서움 보다는 당혹감이 좀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난 이제 나이가 30대가 넘어섰고, 최근 여혐 문제로 온갖 난리통인데다가 여자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현실에서, 어두컴컴한 좁은 길(바로 옆이 차도 이긴 하지만 쌩쌩 지나다니는 차는 도움이 안된다. 내가 뛰어들지 않는다면)을 걷다가 '니 보지 빨아줄게 너도 내 자지 빨아줘' 라고 말하며 바로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남성을 만난다면, 내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이 갈까?

그 남자를 만난 순간부터 역까지 도착하는 그 2분여 남짓의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부디 칼에 찔리지 않게 해주세요. 이 남자가 나를 만지지 않게 해주세요' 라는 생각을 몇 십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역 근처에 다가오자 사람들이 많아졌고 가로등이 있어 밝아졌다.

그러자 뒤에서 계속 저 위의 말들을 반복하며 내 뒤를 바짝 쫓아오던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졌고, 나는 급히 역 안으로 들어갔다. 

뒤돌아서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왠지 마주쳐서는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난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에 스쳐지나가던 순간, 그 남자가 나보다 키가 작았다는 것만, 그것만 알 수 있었다. 내 뒤를 따라오며 저 따위의 말을 내뱉는 사람의 얼굴을 절대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쳐다 볼 수 없었다. 눈을 마주치면, 어쩌면..... 하는 생각에 난 앞만 보고 걸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마치 내가 꿈을 꾸었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앞으로 이 직장을 다니고, 새벽 5시 45분에 나가도 어둡지 않고 날이 밝아지는 그 날 까지는, 절대 그 길을 못 걸을 것 같다.

아쉽고 짜증나지만 집 앞 전철을 타고 두 번 갈아타더라도...(두 번 갈아타는게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하고 귀찮아서 5~6분 더 걸어가서 다른 역에서 탔었다) ㅠㅠ 오늘 걸었던 그 길을 걷지 못할 것 같다.

또 그 새끼를 만날까봐. 



당연히 엄마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엄마가 얼마나 걱정할 지  알고 있고, 또 아빠한테도 말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솔직히 그 순간 정말 무서웠다. 나 혹시 칼에 찔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난 왜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 상황을 겪는 거지? 하는 생각도 했다.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하는 생각은 어릴 때나 했지 머리가 큰 뒤로는 해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억울했고, 어찌보면 별 볼 일 없을지도 모르는 저 개새끼를 내가 무서워 해야 된단 현실이 너무나 좆같고 우습고 싫었다. 

하지만 난 2016년 한국에서 태어난 여자고, 나보다 작고 체구가 작은 남자에게 '너 보지물 많아 보인다, 존나 맛있겠다, 내가 쑤셔 박아줄게' 라는 말 따위를 들으며 칼에 찔리진 않을까 무서워 해야 했다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죽음이 두렵지 않고, 칼에 찔려 죽어도 상관없는, 나 혼자 사는 삶이었다면 그 새끼를 똑바로 쳐다보고 "니 좆이나 셀프로 빨어 존만한 새끼야"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내가 진 빚을 다 갚기 전까지 절대 죽어서는 안되는, 이 짐을 엄마에게 절대 떠넘길 수 없는, 그런 상황. 

그래서 난 내가 절대 다치지 않고 그 순간을 지날 수 있기를 열심히 기도했다. 

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타, 자리에 앉은 순간엔 부처님께 부디 이런 상황을 언니와 엄마가 절대 겪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보다 더 심신이 약한 (ㅎㅎ) 그들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더 끔찍하리라. 



그리고 어두운 새벽, 늦은 밤 출퇴근 모든 여성들이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저 '말' 뿐인 폭행이었지만, 정말 두렵고 두려웠다. 

내가 주짓수 같은 운동을 배워뒀다면...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



그래서 라라랜드 3차를 뛰었다. ㅋㅋ

아침의 저 엿같은 기분을 라라랜드로 치유하기 위해서. 

스타필드 하남 메박 MX관이 라라랜드 보기에 좋다는 소리에, 거기까지 원정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도저히 피곤한 몸 상태로 거기까진 못 갈 것 같아서 동네 아이맥스로 퉁쳤다. 

세 번째로 본 라라랜드는 역시 좋았다. 

제일 첫 번째로 보고 나왔을 땐 평범한데? 라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엠마와 라이언의 얼굴이 생각나고 그 노래들이 생각나고 쓸쓸한 그들의 얼굴과 그들의 탭댄스가 자꾸 생각나서 어라... 이거 안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2차를 뛰었는데.

세상에. 두 번째로 본 라라랜드는 너무나 좋았다. 오히려 처음에 봤을 때보다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처음에 봤을 땐 중간중간 지루해서 좀 길군, 언제 끝나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맙소사. 

두 번째는 시간이 왜 그렇게 빨리 가던지. 게다가 마지막 엔딩으로 들어가는 부분에서부터 나는 이미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울지 않았던 것 같은데, 두 번째는 엔딩 크레딧이 모두 다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계속 눈물이 나서 곤란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3차로 뛴 오늘은 그렇게까지 울진 않았지만 ㅎㅎ 오늘도 역시나 그들의 노래와 연기와 춤은 완벽했고 좋았다. 

너무너무 좋았다. 보길 잘했다. 작년엔 매드맥스를 4차까지 뛰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곧 흑백버젼 개봉하지! ㅎㅎ 그럼 5차닷! ㅋㅋ) 라라랜드도 계속해서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원래 같은 영화를 한 번 이상 잘 안 보는 편인데 간혹 이렇게 몇 번이고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

그게 바로 올해는 라라랜드다. 올해는 비밀은 없다를 2차까지 뛴 것 말고는 한 번 이상 본 영화가 없었는데...

연말에 라라랜드가 뙇 ㅎㅎㅎㅎㅎㅎㅎ



아무튼 앞에 얘기가 너무나 우울하지만, 어쨌든 라라랜드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

물론 내일부터는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되지만 -_-+ 뭐 2~3개월만 그러고 나면 약 3월 말, 4월 초부터는 새벽에도 약간은 밝아질테니... 그 땐 그런 일을 겪지 않겠지 뭐. 



오늘 밤도, 미아와 세바스찬을 생각하며 잠들려 한다. 그들을 생각하면 좋고, 행복하고, 슬프고, 슬프지만 두근거리고 달콤하다. 

그러니까 오늘 밤에도 난 그들과 함께 탭댄스를. 다다닥- 다다닥 탭댄스를 춰야지. 




Posted by 미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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